"자살하지 않는 유일한 근본적 이유는, 오직 '나의 행복'이며, 그 행복의 실현 수단이 타인이 될 수는 있으나, 결국 오로지 내 행복만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사는 이유2>를 친구에게 공유하였습니다.
그는 제 글을 읽고, 자살하지 않는, 살아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함이며, 타인에게 내 행복을 의존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고로 자살이란, 개인이 더이상 행복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고, 타개를 위해 더이상의 노력을 할 수 없는 상태일 때 선택하여야 하는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저의 첫번째 글인 <사는 이유>에서 견지했던 태도에 대한 비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타인에게 의존하여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써 그저 생명을 유지하는 정도의 정신을 유지할 의지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살하지 않는데 대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께 죄송해서 자살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겁한 핑게이며 자신이 겁쟁이라는 것에 대한 자기고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사회 속에서 개인은 자아를 실현하고 행복을 찾기 마련이며 반대로 실패를 경험하거나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만약 그러한 불행이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로 이어지게 될 것이 자명하다면, 차라리 자신을 불행하게 한 사회 또는 타인을 파괴하는 것이 낫다고 친구는 말합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행복을 바라는 강력한 이기심이라고 설명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이기심이란, 타인의 균형상태를 파괴하지 않으며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개그맨 김준현씨는 그의 졸업논문에서 "불행하지 않다면 행복한 것이다" 라고 정의합니다.
저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불행하지 않음=행복> 이라는 그의 견해는 행복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는 이유2>에서 설명하였던 균형론적 관점에서 서술하겠습니다. <사는 이유2>에서 저는, 생존상태가 장기적인 균형이며, 그 상태를 벗어날 정도의 유인이 존재한다면 자살상태로 넘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일시적 변동에 따른 것일수도 있고 장기균형의 이탈로 인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행복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는, 생존과 자살이라는 두 극단적 상태의 균형에서의 경우, 다른 유인이 없는 한, 인간은 초기부존인 생존에 머무른다는 것이고 행복과 불행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는 중간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생존, 불행=자살 이라는 등식이 항상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가 매우 많고, 그 역의 상황은 불행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극단적 선택을 할 확률이 올라가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경기침체의 예시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1997년 IMF사태와 같이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경기적 변동이 발생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이 경우 개인들은 극복하기 어려운 경제적 위기를 경험하게 되고, 이는 개인의 상태를 행복-불행 균형에서 크게 이탈시킵니다. 만약 이러한 거시적 변동을 통해 국가 경제가 장기적인 침체에 빠지게 된다면 개인의 행복-불행 곡선 또한 불행쪽에 치우친 상태로 유지되고, 새로운 장기균형이 형성됩니다. 불행에 치우쳐진 장기균형이 형성된 상태에서 개인이 행복으로 갈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개인의 최적선택은 우선 불행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불행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금 내가 하고있는 게임을 종료하고 컴퓨터의 전원을 끄는 것 입니다.
모 헬스유튜버 김xx의 자살 또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여지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는 전 부인과의 채무관계를 해소하고, 그녀에게 피해를 끼치기 위해 자살을 택합니다. 이는 장기적 관점에서 불행상태를 타개할 방도를 알아내지 못한 개인의 죽음이며, 전 부인의 불행(기존 장기균형에서 이탈한 새로운 장기균형 형성)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한 자의 말로이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살이란, 타인의 장기균형상태 즉, 모든 타인이 이기심을 충족하고 있는 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자신의 장기균형인 불행을 타개하는 가장 손쉬운 수단일 것입니다.
이기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기심이란 자신의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결코 불행상태를 타개할 수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사람들은, 그 상태를 타개하는 것이 1차적이자 궁극적 목표가 됩니다. 이는 타인의 행복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생존하고 있을 경우 다른 사람들이 겪게 될 수 있는 미실현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가장 이기적인 선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두가지 요소를 저울질하여 자신의 생존이 사회적으로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가족을 위시한 타인이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 자신의 불행을 가중시키지 않는 방법이라고 여긴다면, 그들의 선택을 이해할 여지가 생깁니다.
이러한 선택은 타인의 행복에 자신의 행복을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이란 수많은 구성요소들의 합이며, 그 내부의 가중치는 개별적이고 상이합니다. 따라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이라는 것에 상당한 가중치를 둘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컨데 저는 어떤 경우에도 타인의 행복을 파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치관을 견지하는 것이 종종 저의 행복에 기여하기 때문입니다. 주변인들이 불행한 경우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은 5년째 자낙스를 복용중입니다. 군에서 친구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들의 세상이 무너질 때 저의 세상의 일부도 같이 무너집니다. 그의 세상은 저의 세상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느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대부분의 경우, 저는 타인의 장,단기 균형을 이탈시키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분명 타인의 장, 단기 균형을 이탈시키는 것 보다 저의 불행상태를 끝내는 것이 더 이기적인 선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는 이유2>에서 저는 살아가는 이유를, 행복 또는 불행의 관점이 아닌 균형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균형론적 관점이 지금까지 제가 찾아낸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모든 선택은 행복과 불행을 기반으로, 그것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의 가중치에 대한 순간적 판단의 결과일 것입니다. 그것이 다소 충동적인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모든 선택은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비록 납득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다음에는 행복에 관해 더 깊게 써볼 생각입니다.
당신의 이유를 존중합니다.